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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있고 다른 나라에는 없는 한강과 궁궐 이야기

by 해피 한다스 2023.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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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있지만 다른나라의 수도에는 없는 것이 무었이 있을까요?

 

정조때 한강을 건넜던 방법인 배다리

다른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우리나라 수도 서울과는 어떻게 다른지 비교를 하게 되는데요

바로 첫번쨰로는 한강입니다.

 

한강은 폭이 1km가 넘고 한강하류로 가면 더욱 넓어져 2km가까이 넓어지죠 그래서 옛날에는 한강을 건너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습니다. 

 

1900년대에 개통된 한강철교로 시작해서 가칭 '고덕대교'가 완공되면 한강다리는 34개가 될정도로 이제는 한강을

건너는 것이 여려운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북쪽과 남쪽의 교류를 힘들게 했던 한강이 이제는 어떠한 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랜드마크가 되었죠.

 

 

반포대교

두번째로는 궁궐입니다.

궁궐에 이야기는 참 재밋습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은 5개가 있죠.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운궁(덕수궁),경희궁 입니다.

 

고려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고려에 국운이 다해 새로운 나라를 열면서 수도를

옮기겠다고 한뒤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가 정해지고 국가의 기반을 정도전이 닦으면서 왕이 업무도 보고

행사도 하고 잠도 자는 경복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수도를 옮긴것도 잠시 이방원이 왕자의난으로 정권을 잡고 장자승계 법칙을따르기 위해 잠시 형인 이방과를 왕으로 앉히게 됩니다. 정종은 자신은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이방원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머님의 묘를

보러 개경에 간다고 하고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수도가 다시 개경으로 된이후 이방원(태종)이 왕이 되고 멀어졌던 이성계와 화합을 하기 위해

다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때 경봉궁으로 간 것이아니라 창덕궁을 새로 만들어서 창덕궁에서 살게 되는데

왕의 양궁체제게 시작이 됩니다.

아마도 추측으로는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에 가고 싶지 않았던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왕은 궁이 2개가 있어야 했는데요, 이유는 화재가 났을때 혹은 다른 이유로 궁을 옮겨야만 하는 상황에 대비해 2개의 

궁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경복궁과 창덕궁이 된것입니다.

 

태종이 죽고 세종은 다시 경복궁으로 가게됩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전인 선조 떄까지 왕이 이용하게 되었죠.

 

조선에서는 왕에 버금가는 대왕대비에게도 집을 만들어 줬어야 했는데 그냥 좋은 집 한채를 내주면 끝이 아니라

대비들의 손발이 되어주는 공무원도 함께 따라가야 했기 때문에 규모가 커야 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궁이 바로 창경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지을때 방향이 참 중요하다고 느끼는데요 창경궁은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동궐이라고 

불렸습니다. 창경궁이 동궐이라고 불려서 자연스럽게 경복궁은 북궐이 되게 되었죠.

 

하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개의 궁궐이 다 타버린 것입니다.

선조가 피난을 가는 바람에 궁궐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죠.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한양으로 오긴 왔는데 왕이 거처할 곳이 없으니 어디에 거처를 마련해야 할까요?

 

한양에 왔는데 왕이 머무를만한 멀쩡한 궁이 없어서 찾아보니 월산대군이 쓰던 저택이 규모도 크고 왕이

머무르기 괜찮았나 봅니다. 왕이 머무르면서 점차 저택이 커지게 됐는데 여기가 바로 경운궁이 됩니다.

고종이 아관파천하고 경복궁이아니라 경운궁에 머물게 되면서 더욱 커지게 된 그 경운궁 입니다.

 

창덕궁을 복원하고 경복궁까지 복원하기엔 국고가 너무 많이 소요 되기때문에 이때부터 흥선대원군때까지

경복궁은 200년간 아무도 쓰지않는 공터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물론 공터라고 백성들이 출입 할수는 없었죠.

 

이때부터 창덕궁이 본궐이 되고 경희궁을 만들어 다시 양궁체제가 시작됩니다.

 

흥선대원군때가 되어서야 무리를 해서 다시 경복궁을 재건하게 되는데 

이때가 되어서야 왕이 다시 경복궁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경복궁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왕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것이죠.

 

고종은 비겁했습니다. 와이프를 죽인 놈들과 맞서 싸울 생각보다는 자기도 죽을까봐 

더 강한 국가를 찾아서 숨어버린 것이죠.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조선에 있지만 외국땅인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독립협회가 만들어지고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고종은 환궁하게 되는데

경복궁으로 가는 것이 아닌 경운궁으로 가게됩니다.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이 강제로 체결된 것임을 알리려다가 실패하게 되어 고종이 폐위 되고

아들 순종이 왕이 되었는데 왕에서 내려온 고종을 '덕수'라고  칭하게 되었는데

'덕수'가 머물렀던 궁이라하여 경운궁=덕수궁이 된것입니다.

 

순종 또한 대한제국 붕괴후 경복궁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창덕궁에 거처하게 됩니다.

 

을사조약이후 경봉궁의 수난시대는 계속 되는데요

1915년 총독부는 아무도 안사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목적은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업적 과시,계몽과 선전의 도구를 목적으로 일종의 엑스포를 개최한 것이죠.

 

왕이 살던 곳이라고 해서 전국의 관광객들이 모두 경복궁으로 모여들었고 경복궁 관광하면서 경복궁이 많이 훼손되어

10%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엑스포가 성황리에 마무리 됐네요..

 

글을 포스팅하면서 경복궁에 감정이입이 되서 경복궁이 안타깝게 여겨지게 될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

 

 

 

 

이상~ 서울에는 있고 다른 나라에는 없는 한강과 궁궐 이야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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